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보에몽, 큰 그림을 그리다 === ||<:>[[파일:Prince_Bohémond_1er_de_tarente.jpg|width=300]] || || [[보에몽 1세]] || 그가 안티오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제쳐야 할 내부의 경쟁자는 각각 툴루즈의 대백작 [[레몽 4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그리고 그가 파견한 동로마군의 사령관 [[타티키오스]]였다. 첫 번째 상대 레몽 4세는 십자군에서 가장 큰 병력을 지원한 최대주주였으며, 경건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 비해 영토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 대리인 아데마르 주교와 교황군을 호송한 실질적인 십자군의 리더였으며, 안티오키아 공방전에도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 상대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의 원 소유주로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군주였다. 명목상으로 모든 십자군은 동방의 황제인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점령 영토를 돌려주기로 서약한 바가 있었다. 알렉시오스 또한 예루살렘과 그 일대의 지방은 십자군에게 양도할 생각이 있었으나, 거대하고 부유한 상업도시인데다가 겨우 십수년 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안티오키아는 서방 십자군에게 내 줄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가 [[니케아]]를 수복하면서 항복한 [[룸 술탄국]] 병사들과 신민들을 돌려보내주고 약탈을 금지한 것을 시작으로, 그와 서방 십자군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전사들은 알렉시오스와의 약조를 지킬 생각이 없었고, 그들과의 조약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동로마 해군이 지원하는 약간의 식량과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2000여 명의 정예군뿐이었다. 1098년 1월,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기독교인 수비대장 피루스가 그에게 귀순하여 문을 열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로서 안티오키아 점령은 확정된 것이었으나, 보에몽에게는 안티오키아가 그의 영지가 되어야 한다는 보상이 필요했다. 그는 신중하게 피루스의 귀순을 숨기고, 다른 십자군 영주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첫 번째로 그가 공략한 상대는 [[타티키오스]]였다. 이미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동로마군은 같은 십자군 영주들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는데, 보에몽은 그러한 타티키오스의 심리를 노렸다. 그는 타티키오스의 군영으로 찾아가 레몽을 비롯한 십자군 영주들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모략을 거짓으로 꾸며 전달했다. 이미 십자군을 의심하고 있었던 타티키오스는 그 길로 동로마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치듯 떠났다. 타티키오스의 퇴각은 십자군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영주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버린 동로마군을 비난했다. 안티오키아 포위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보에몽은 영주들에게 마지막 일제 공격을 제안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영주들은 그의 제안을 반대했지만, 자신과 자신의 병력이 선봉에 서겠다고 주장한 보에몽을 한번 믿어 보자는 의견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다. 보에몽은 그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는 대신 레몽과 다른 십자군 영주들에게 이번 돌격이 승리하면 안티오키아의 소유권을 이양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레몽과 일부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황제와의 조약을 상기시키며 거부했으나, 이미 떠나버린 동로마군에 대한 책임론이 비화되며 묵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